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정재서(63) 이화여대 중어중문과 교수는 동양신화 전문가다. '책에 있다'(在書)를 뜻하는 이름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유독 책을 좋아했고 지금은 책을 연구하고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대화하는 교수가 돼 있다.
서울대 생물학과에 재학 중이던 정 교수는 중문학을 복수 전공하며 동양신화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당시 동양신화는 중문학의 본류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지만, 신화와 도교는 20대 청년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평생을 함께하게 했다. 서른두 살에는 동양의 대표 신화집 '산해경'(山海經)을 국내 최초로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정 교수의 화두는 단연 동양신화의 정체성과 상상력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서양 중심 사고체계에서 벗어나 동양신화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이를 통해 상상력을 발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양신화의 전도사'를 자임하는 정 교수를 만났다.
-- 이름에 담긴 뜻이 특별한 것 같습니다.
▲ '재'(在) 자는 항렬입니다. 이름에 '글 서'(書) 자를 잘 쓰지 않는데 할아버지가 공부 잘하라고 그런 건지 넣었습니다. 이름처럼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책에 있다'는 뜻처럼 저는 책에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지금도 항상 책을 끼고 다녀야 하고, 책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할아버지가 제게 맞게 이름을 잘 지으신 것 같아요.
-- 동양신화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게 됐습니까.
▲ 대학 1학년 때 중국의 도가서인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접했습니다. 밤새워 읽었는데 손에서 뗄 수가 없었어요. 아침에 세상이 달라 보이더군요. 달의 앞면만 보다가 비로소 뒷면을 본 느낌이었어요. '지금까지 우리는 중국 문화의 앞면만 봤지 뒷면은 보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원래 생물학이 전공이었는데 중문학을 복수전공 했어요. 사람은 자기 취향을 따라가나 봐요. 당시는 합리주의와 과학주의가 지배하고, 1960~1970년대 한국은 근대화, 산업화의 시기이자 미신타파 운동을 하던 때였죠. 그런데 이상하게 옛날이야기라던가 신비하고 환상적인 이야기에 끌리더라고요. 신화나 도교는 정통 중문학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고, 학문 자체도 정립되지 않던 시절이어서 대부분이 '저 사람 취미가 이상해서 저런 거 하나보다' 하고 생각했죠. 이제야 중국신화가 빛을 보게 됐네요.
-- 국내 최초 '산해경'을 번역, 소개했습니다.
▲ 산해경은 최초의 중국 신화서이자 동아시아 상상력의 원천입니다. 1981년에 한국연구재단(옛 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을 받아 3년 반만인 1984년 9월에 번역을 완료했어요. 산해경을 국내에서 처음 번역했는데 반응은 굉장히 차가웠어요. '이런 쓸데없는 책을 왜 번역했냐'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죠. 당시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협소하고 상상력, 이미지, 스토리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가 있죠.
이후 산해경이 서서히 부각됐고, 가장 먼저 문학가들이 주목했죠. 고(故) 김현 평론가는 평론집의 부제에 산해경에 나오는 동물 이름을 달았고, 황지우 시인은 '산경'(1987)이란 시에서 산해경의 형식을 패러디해 군사정권 시대의 어두운 현실을 풍자했어요. 지금은 성석제, 신경숙, 박상륭, 권혁웅, 박인홍 등 많은 문인이 작품에서 산해경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김형경의 소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는 산해경에 나오는 구절을 그대로 제목에 쓴 경우죠. 산해경은 지금 기본 교양서 중 하나가 됐습니다.
-- 동양신화는 한국신화와 어떻게 다른가요.
▲ 동양신화는 중국 대륙의 신화를 편의상 부르는 거예요. 신화시대는 국가나 민족의 경계가 없잖아요. 중국이라고 하면 너무 편협하게 볼 수 있고, 거대한 아시아 대륙에 많은 민족이 모여 살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동양신화라고 부를 수 있는 거죠. 우리나라, 몽골, 티베트, 일본, 동남아 등 많은 아시아 민족의 신화와 문화가 중국신화에 같이 녹아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서양신화를 대표하는 것처럼 중국신화는 동양신화를 대표합니다.
중국신화에 우리의 신화와 문화가 상당 부분 포함된 것은 자연스러운 거죠. 단군신화에 보면 환웅과 함께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고, 또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 부인이 하백(河伯)의 딸로 소개됩니다. 풍백, 우사, 운사, 하백은 모두 중국신화에 등장하죠. 신화를 배타적으로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 서양신화의 범람을 위기로 진단했습니다.
▲ 서양신화를 배타적으로 보자는 게 아닙니다. 현재 그리스 로마 신화는 마치 우리의 신화처럼 돼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잘 알아도 정작 동양신화나 한국신화는 잘 모르는 것이 문제이죠.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나 안데르센 동화 등 서양 상상력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서양신화는 빨리 받아들였지만, 동양신화는 배제되고 소외됐다는 점이죠. 그리스 로마 신화에만 너무 탐닉하면 상상력의 편식을 하게 됩니다.
-- 어떻게 상상력의 편식을 하고 있습니까.
▲ 예를 들어 '인어'를 떠올려보라고 하면 100명이면 100명이 모두 동화 속의 예쁜 인어아가씨나 인어공주를 생각합니다. 동양신화에 등장하는 머리가 듬성듬성한 인어아저씨를 떠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이미 현대 한국인의 상상력에 인어아가씨나 인어공주가 표준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상상력이 자유롭다면 인어아저씨나 인어할머니도 생각해야죠. 지금 우리의 상상력은 절대 자유롭지 않습니다.
-- 상상력이 자유로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상상력이 진짜 자유로우려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표준으로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인어공주의 상상력과 이미지만 갖고 있는 사람과 인어아저씨에 대한 상상력과 이미지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누가 더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이미지를 활용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인어아저씨의 상상력까지 가진 사람입니다. 동양신화가 필요한 이유죠.

-- 신화는 왠지 현실과 멀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 신화는 현대 한국사회와 동떨어진 게 아닙니다. 지금은 상상력, 이미지, 스토리의 시대입니다. 창의적인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너도나도 외치고, 디지털화된 세상은 이미지를 매개로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토리텔링의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졌습니다. 상상력, 이미지, 스토리는 현대인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모두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이 세 가지의 뿌리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두고 있었죠.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차원으로 비상하려면 그리스 로마 신화의 반대편에 있는 동양신화가 필요합니다. 전혀 다른 상상력, 이미지, 스토리의 원천이 바로 동양신화인 거죠. 더구나 지금은 중국이 부상하는 시대입니다. 동양신화의 상상력이 지금 바로 필요한 이유죠.
-- 동양신화는 실제 우리 삶과 어떻게 연결되나요.
▲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현대 문화산업에서 더 흥미롭고 더 기발한 것을 만들어내려면 그동안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동양신화를 활용해야 합니다. 남들과 다른, 특색 있는 상상력의 정체성을 갖고 있어야 세계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서양 판타지의 중심에는 마법과 기사 이야기가 있어요. 판타지 영화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가 바로 이를 토대로 성공한 경우죠. 중국은 무협 판타지이고, 일본은 요괴 판타지가 중심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요괴들은 수백 년 전 에도 시대 그림에서 나온 겁니다.
우리는 이런 나름의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흉내를 내는 것에 그치고 있어요. 우리의 이야기 자산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동양신화는 아직 미개척의 땅입니다. 동양신화의 상상력과 이미지, 스토리를 빨리 문화산업의 자산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동양신화는 우리의 일상과도 연결돼 있습니다. 우리가 제사상에 복숭아를 놓지 않는 이유를 찾아보면 귀신의 우두머리인 영웅 예가 복숭아나무로 만든 몽둥이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죠. 복숭아 트라우마가 있어 복숭아를 놓으면 조상귀신도 올 수 없다는 겁니다. 또 고구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염제(炎帝), 불의 신, 수레의 신, 신도비의 귀부 등의 모습도 동양신화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신화학자로서 현재 한국사회는 어떻게 진단하고 있습니까.
▲ 불안하고 암울한 상황입니다. 이런 난세에 가장 잘 살아가는 방법이 처세술이겠죠. 서점에서 처세서나 실용서가 잘 팔리는 이유입니다. 다른 한편에는 힘든 마음을 위로해주는 힐링 서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화는 처세와 힐링이란 두 가지를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처세나 실용의 측면에서 신화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상상력, 이미지, 스토리의 보물창고입니다. 신화를 공부하면 미래를 대비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힐링의 측면입니다. 사람은 힘들고 외로울 때 단절감을 느낍니다. 신화는 인간과 자연, 사물의 연대감이 가장 충만했던 시기의 산물이에요. 자연, 동물, 식물과 대화했던 시기죠. 신화는 사물과의 교감 능력을 키워주고 자연과의 단절된 감성을 회복시켜 치유의 힘을 줄 수 있습니다.
-- 신화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치유할 수 있습니까.
▲ 산수화나 풍경화를 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의 감정은 담담해지죠. 자연을 매개로 했을 때 우리 감정은 정화되고 치유됩니다. 근대 이후 우리는 인간을 중심으로 기계, 물질과 밀착된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 우주와 단절되었습니다.
대중가요를 봐도 그래요. 옛날 노래와 달리 요즘 노래에는 오로지 자기감정만 직접 표출하지 거기에는 자연이 없어요. 기쁠 때는 감정이 폭발하겠지만 슬프거나 괴로우면 그 감정이 100% 고스란히 자신을 향하게 되죠.
옛날에는 우주와 자연, 신화가 인간의 감정을 정화하는 역할을 했어요. 달님이나 달의 여신으로 의인화시킨다는 것은 달이 대화를 하고 교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거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우주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위로를 받고 치유가 될 수 있는 거죠.
--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빠져 사는 현대인은 어떤가요.
▲ 대화 기능이 있지만 섬뜩할 때가 있어요. 과거에는 지하철을 타면 신문을 보고 이야기를 하며 떠들썩한 분위기였는데 요즘은 다들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있어요. 마치 화두가 스마트폰에 있는 듯 '스마트폰 참선'을 하고 있죠. 외계와의 교감이 중요한데 현대인은 너무 고립돼 있어요. "저 별은 나의 별~" 하는 1970~1980년대 노래를 유치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게 아닙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신화적인 교감 능력이 필요합니다.
-- 원숭이의 해입니다. 신화 속 원숭이는 어떤 존재입니까.
▲ 십이지의 동물은 인간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원숭이는 인간의 자화상이죠.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삼장법사를 모시고 여행하면서 마귀들을 물리치고 서역에 도착해 불경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이런 이야기는 인생이나 인격의 완성 과정을 의미합니다. 까부는 손오공은 인간의 불안정한 마음을 상징하죠. 동양에서 인간의 마음을 '의마심원'(意馬心猿)이라고 표현합니다. '의지는 말처럼 날뛰고 마음은 원숭이처럼 까분다'는 뜻이죠. 인간을 원숭이나 말처럼 불안정한 존재로 본 거예요. 손오공이 만나는 요괴들은 우리 마음속의 성욕, 식욕, 명예욕, 권력욕 등 모든 욕망의 화신입니다. 손오공이 요괴를 물리쳐 가는 것은 바로 마음을 다스리는 인격 완성의 과정이에요. 원숭이의 해를 맞아 원숭이를 손오공처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자신으로 생각했으면 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우리 자신을 더 냉철하게 돌아보는 한 해가 됐으면 합니다.